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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새 日공문서 확인

by 석아산 202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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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새 日공문서 확인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새 日공문서 확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조선일 학살 만행이 이번에는 또 새로운 문서로 확인되었습니다.

정말 천인공노할 짓인데요, 일본인은 빨리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자, 그럼 소식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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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새 日공문서 확인

 

100년 전 발생한 간토 대지진 직후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실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일본 공문서가 확인되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5일 보도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언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실에서 간토 대지진 직후 조선인 40여 명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된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를 찾아냈습니다.

이 문서는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현 서부 지역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했던 육군 지방기관인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했으며, 1923년 12월 15일에 상부 기관인 육군성에 제출되었습니다.

조선인 학살은 간토 대지진 사흘 뒤인 1923년 9월 4일에 경찰관들이 조선인 200여 명을 사이타마현 우라와에서 후카야·혼조 경찰서 방면으로 이송하던 중 발생했습니다.

구마가야 사령부는 당시 낮에 이동하지 못한 조선인 40여 명이 해가 저물자 "살기를 품은 군중에 의해 모조리 살해되었다"고 문서에 기록했습니다.

 

문서는 이 사건을 '선인 학살', '불상사', '불법 행위'로 표현했습니다.

아울러 "조선인 습격은 없었다. 방화도 없었다. 독을 넣었다는 것도 듣지 않았다"고 기술하여 당시 일본 사회에 떠돈 조선인 습격·방화 소문이 적어도 해당 지역에서는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사령부는 밤에 학살이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여 참고 소견으로 조선인 이송은 밤을 피해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밤에 조선인을 이송하면 어두운 곳에서 사람이 살해되는 참상을 보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이 문서에서 재향군인회 구마가야 지부장은 조선인 관련 헛소문에 빠진 사람들을 "사리를 모르는 몽매한 무리"라고 비판했습니다.

그간 학살 중심 세력으로 알려졌던 재향군인의 조선인 인식이 지역에 따라 달랐다는 것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와타나베는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것은 확실하지만, 집단적 정신 이상이나 권력 탄압 등 기존 견해로는 학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시야를 넓혀 학살의 전모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지난 9월 가나가와현 학살 자료를 분석한 서적이 출간되고, 사이타마현 학살 정황이 담긴 기록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조선인 학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간토 대지진 100주년인 올해 여러 차례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매번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구체적인 언급과 학살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참고 :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이란?

 

간토 대지진(관동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역사적으로 큰 지진입니다.

이 지진은 일본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자연 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생 시간 및 위치: 1923년 9월 1일 낮 11시 58분경, 일본 간토 지방(현재의 도쿄, 치바, 가나가와, 사이타마 현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규모: 이 지진의 규모는 약 7.9로 추정됩니다. 지진의 진앙은 사가미만 인근이었으며, 그 영향은 광범위하게 미쳤습니다.

 

피해 상황: 간토 대지진은 광범위한 파괴를 일으켰고, 수많은 건물이 붕괴되었습니다. 특히,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불이 번져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화재와 건물 붕괴로 사망했습니다.

사망자 수: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약 10만 명에서 14만 명 사이로 추정됩니다. 이는 당시 건물들의 내진 설계가 부족했고, 지진 발생 시각이 점심 시간과 겹쳐 많은 사람들이 집 밖에 있었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회적 영향: 지진 이후 사회적 혼란과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사회적 긴장과 혼란 속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 소수민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과 박해가 발생했습니다.

 

경제적 피해: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도쿄와 요코하마는 당시 일본의 주요 경제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지진은 일본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재건 노력: 지진 후, 일본 정부는 피해 지역의 재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 계획과 건축 규정이 개선되고, 내진 설계가 강화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간토 대지진은 일본의 역사, 사회,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일본의 재난 대응과 도시 계획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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