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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세상

광개토대왕비 일본 조사 기록 공개... 석회 덮었다

by 석아산 2023.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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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일본 조사 기록 공개... 석회 덮었다
광개토대왕비 일본 조사 기록 공개... 석회 덮었다

 

개토대왕비는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 거대한 석비에, 호방한 우리의 기상이 새겨져 있다는 면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여 주는 유물인데요.

 

그런 만큼, 중국에서는 '호태왕'이라고 해서 자기 민족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일본은 그 업적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광개토대왕비가 풍화되자, 그것을 석회로 덮고 기억에 입각해서 추측한 글자를 써 넣었다는 기록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소식이기 때문에 꼭 소개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소식 전해드립니다.

5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고구려의 대군주 광개토대왕(374~412).

그에 대한 연구를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사실 일본 학자들입니다. 높이가 6미터가 넘는 대왕의 비석을 그들은 처음으로 샅샅히 훑으며 살피고, 탁본도 뜨고 사진 찍고 글자를 판독했습니다.

하지만 공식 조사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죠.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1913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사상 최초로 만주벌판에 흩어진 고구려 유적들을 학술조사했습니다.

압록강 기슭 잡안에 있는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터와 환도산성을 비롯한 인근의 산성과 장군 총 등을 비롯한 숱한 무덤과 5세기 광개토대왕비석을 열흘 넘게 둘러보고 200장 넘는 사진을 찍고 현장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당대 일본을 대표하던 학자였던 도쿄대 건축과 교수 세키노 다다시가 단장을 맡고 문헌사에 밝은 조사원 여러 명이 수행원으로 참여한 조사단은 1000킬로미터 이상 되는 방대한 거리를 주파했습니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조선의 중부와 북부를 가로질러 압록강 건너 집안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한달 이상 걸린 대규모 조사였습니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마땅히 내야 할 후속 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았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죠.

조사단을 이끌었던 세키노 다다시를 비롯한 1인이 학술잡지에 간단하게 조사를 요약한 글을 쓴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이 찍은 유적의 사진은 오늘날 지금까지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와 주변 풍경, 피라미드를 방불케 하는 장군총 등의 사진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리면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이 '고구려!'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유적의 이미지를 생성하게 됩니다.

집안 근교의 고구려 성인 산성자 산성을 실측스케치한 야쓰이 세이이쓰이 야장 도면. 처음 공개되는 자료다.
집안 근교의 고구려 성인 산성자 산성을 실측스케치한 야쓰이 세이이쓰이 야장 도면. 처음 공개되는 자료다.

그런데 최근, 고구려 유산의 실체를 후대에 처음 드러낸 계기이면서도 조사 경위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떤 1913년 집안 유적 조사의 주요 내용을 담은 당시 사진과 도면 등의 현장 조사 자료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공개한 이는 20세기 초 일제가 처음 기틀을 놓은 한반도 유적 조사의 실상을 추적해온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정인성 교수입니다. 그는 수년 전 일본에서 입수한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1880~1959)의 학술 사료들을 뒤져 1913년 일본의 조사단이 총독부 지원을 받은 1차 조선 고적 조사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만주 집안 유적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 280장과 관련 도면 70여점을 발굴하였습니다.

 

공개된 사료들은 일본인 학자들이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학술조사한 기록 원본이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료는, 광개토대왕비의 비석 표면에 석회칠을 하고 글자를 임의로 새겨넣었다는 당시 중국인 탁본업자와 조사원 야쓰이가 면담한 기록입니다.

 

현지에 살던 탁본업자 초붕도를 만나 헌병보조원의 통역으로 대화해보니 풍화로 비석 표면이 닳자 1900년부터 색회를 계속 바르고 기존에 모본으로 생각한 문장의 글자를 임의로 새겨 넣었다는 내용입니다.

광개토왕비 비석을 19세기말 이미 일본군 등이 석회로 덮고 내용을 변조했다는 의혹을 1970년대 역사학자 이진희가 제기한 바 있었지만, 이 면담 사료는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1980년대초에는 중국 학자인 왕젠췬이 탁본한 업자의 후손을 만나 비석을 보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석회로 덮고 글자를 다시 넣었다는 진술 내용을 논고로 소개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당사자를 인터뷰한 면담 기록이 처음 나온 것이어서 학계에 파장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료는 물론 일본군이 이렇게 비문을 직접 변조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세키노나 이마니시가 몇 년 뒤 자신의 개인적 논고에서 일부 전언 형식으로 탁본업자의 진술을 인용한 기록도 있지만, 1900년대 초반부터 석회를 계속 바르면서 비석 표면을 보강하고, 누가 제공한 문자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글자를 써넣었다는 당사자의 직접 증언이 기록된 확실한 자료가 있다는 점을 발견한 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비문 변조설의 재검토가 적극적으로 실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개토왕비에 석회칠을 하며 탁본업을 했던 중국인 초붕도와의 면담기록을 요약한 메모. 1913년 10월 압록강변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일본 고적조사단의 일원 야쓰이 세이이쓰가 기록한 것이다. 1913년 최초로 진행된 일본 학자들의 집안 유적과 광개토왕비 조사 기록 가운데 핵심자료로 꼽힌다.
광개토왕비에 석회칠을 하며 탁본업을 했던 중국인 초붕도와의 면담기록을 요약한 메모. 1913년 10월 압록강변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일본 고적조사단의 일원 야쓰이 세이이쓰가 기록한 것이다. 1913년 최초로 진행된 일본 학자들의 집안 유적과 광개토왕비 조사 기록 가운데 핵심자료로 꼽힌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현재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에서 한일 학계사이에 첨예한 논란이 일고 있는 '신묘년조'에 해당하는 내용이 일절 없다는 점입니다.

신묘년조는 광개토왕의 재위기인 391년 신묘년에 왜의 세력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구절, 이른바 '래도해파'(來渡海破) 구절입니다.

 

이는 당시 고대 일본의 대륙 진출 역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총독부와 일제 식민사학계의 입장으로 보면, 이 구절을 전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정 교수는 "당시 석회칠을 한 비석의 상태가 자신들이 해석한 래도해파 구절을 보여줄 수 없는 컨디션이었을 가능성이 커서 찍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저도 이런 가설에 동의합니다.

정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은 만주 고구려 유적과 한반도 북부 유적들이 23개의 항목으로 나뉘어 묶여 있습니다.

그중 광개토왕비는 항목 7로 묶여 18장이나 되는 사진을 찍었는데, 일본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신묘년조'는 아예 빠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집안 유적의 당시 현장 도면이 두어점에 불과한 데 비해 야쓰이가 소장했던 원래 조사자료에는 70점 이상 들어 있어 당시 조사단의 실사 현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평가입니다.

 

석회로 덧바르고 새롭게 다시 비문을 팠다면... 엑스레이 촬영 등을 통해 겹쳐 있는 글자 등이 판독되지는 않을까요? 이런 일이 있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연구진이 먼저 가서 잘 연구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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