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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세상

'진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일부 발굴…탄피·탄두도 확인

by 작가석아산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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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일부 발굴 탄피, 탄두도 확인
'진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일부 발굴 탄피, 탄두도 확인

 '진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일부 발굴…탄피·탄두도 확인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래서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뉴스를 보기 전에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 정보를 알아야겠어서요.

 

일단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지난 1950년 7월 진주시에 거주하는 20~30대 농민 남성 7명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 등으로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되고 진주 명석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항산 일대에서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당한 사례입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1월 회의를 통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런 국민보도연맹은 여러 지역에 산포해 있는 모양이었는데요. 국민보도연맹 사건 전체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國民保導聯盟虐殺)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번에 진주 지역에서 유해가 발굴되었으니...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 사건은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는 미군도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개입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철저히 은폐했고 금기시해 보도연맹이라는 존재가 잊혀져 왔지만, 1990년대 말에 전국 각지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보도연맹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이 확인됐습니다. 2009년 1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정부는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현재에도 사건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민간인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학살을 하고 그런답니까... 민간인들이 인민군에 봉사했다고 해도, 그들의 강요 때문에 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나라 역사 너무나 비참하네요 ㅠㅠ 뉴스에서 보도된 유해 발굴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경남 진주지역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해가 일부 발굴됐습니다.

유해 발굴을 맡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소'는 4일 경남 진주시 관지리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조사 현장에서 중간 보고회를 했습니다.

이번에 유해가 발굴된 구덩이는 길이 510㎝, 너비 210~240㎝, 깊이 40㎝ 규모입니다.

 

이곳에서 두개골 2점과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 80여점, 탄피와 탄두, 단추, 칫솔, 틀니, 동전 등이 출토됐습니다.

 

구덩이 안은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가 빽빽하게 늘어져 있었으며 일부 틀니 등 유품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날 현장을 찾은 한 70대 남성은 "아버지가 여기 묻힌 것 같다"며 눈물짓기도 했습니다.

동방문화재연구소는 이 구덩이에 20구가량 시신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발굴된 형태는 구덩이 안에 매장된 유해와 구덩이를 덮고 있던 복토층(적갈색 사질점토)에서 출토된 것으로 구분됩니다.

복토층에서 출토된 유해는 무덤 조성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쓸려 들어와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유해가 매장됐을 당시 정확한 상황은 파악하기 힘듭니다.

동방문화재연구소는 이를 토대로 주변 지역에 매장된 유해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구덩이에서 확인된 유해는 2~3중으로 중첩돼 출토됐으며 완전한 형체를 띤 유해는 없었습니다.

 

조사지역인 명석면 관지리 산174번지는 진주 서북부에 위치한 해발 211m의 산 하단부입니다.

 

동방문화재연구소 이호형 원장은 "유해가 포개진 상태이고 지면에 편평하게 놓여 있은 점 등으로 보아 주변에 있던 유해를 이 구덩이에 2차 매장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유해와 유품을 수습하고 이에 대한 기록을 작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15일부터 진주경찰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들을 예비검속 해 진주경찰서와 진주형무소에 구금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7월 21~26일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일대에서 학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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