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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책리뷰)

[책 리뷰] 물은 H2O인가?

by 석아산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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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도발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과연 H2O인가?"

네, 당연하지요. 우리는 과학 시간에 그렇게 배워 왔고, 이건 당연히 상식입니다.

그럼 물이 H2O이지, 그게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지닌, 이런 과학적 결론의 '유일무이성'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라고 권유합니다. 이 H2O라는 것은 물론 과학의 탁월한 이론적 성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정설'로 굳어짐에 따라, 이 H2O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전까지 다양하게 존재해 왔던 이론들은 모두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양한 과학적 이론들이 서로 맞서며, 그것이 서로를 보충하는 '상보성'을 가지는 것이 더욱 좋은 태도라고 역설하지요.

 

예를 들면, 물의 성질에 대한 플로지스톤주의와 산소주의의 대립이 있습니다. 이는 결국 라부아지에가 제창한 산소주의의 승리로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플로지스톤주의의 다른 개념들, 예를 들어 퍼텐셜 에너지나 전자 등은 살아남아 이 분야에 적용되게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플로지스톤주의는 '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해야만 할까요?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프리스틀리의 플로지스톤 개념에 대하여, 그것이 완전히 폐기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의 플로지스톤 개념은 과학계에서 퇴출되어서는 안 되는 개념이었다는 것이죠.

 

(1) 수소 + 산소 → 물
 (2) 과플로지스톤 물 + 탈플로지스톤 물 → 물

저자에 의하면, (1)의 산소 이론과 (2)의 플로지스톤 이론 모두 사실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1)의 이론만 살아남았죠,

저자는 이 (2)의 이론이 때 이르게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에 따라 이 이론이 다른 여지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 역시 사라져 버렸다고 말이죠.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행동주의적 태도를 견지합니다. 즉 어떻게 이 이론의 폐기가 과학의 발전을 어떻게 가로막았는지를 실증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다음의 질문을 던집니다.

 

(1)과학자들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을 거부함으로써 상실한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이제부터 나는 한낱 이론보다 더 많은 것이 결부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론’ 대신에 ‘시스템’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했고 산소주의 시스템은 할 수 없었던 좋은 것이 있었을까? 과학혁명은 전형적으로 그런 지식의 상실을 동반한다고 쿤은 생각했다. 그를 기리는 뜻에서, 이를 ‘쿤 상실Kuhn loss’이라고 부른다.
(2)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발전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이론의 때 이른 죽음 때문에 발전이 지체되거나 가로막힌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
(3)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이 둘 다 있었을 때,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이로운 결과들이 있었을까?
(4)만약에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 사이에서 이로운 상호작용이 계속되었을까? 

저자는 이렇듯 플로지스톤주의와 산소주의의 대립을 아주 생생한 필치로 묘사해 나갑니다.

그리고 기존의 견해에 반하는 충격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것은 흔히 라부아지에의 '옳은' 견해를 늘 비판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왔던 프리스틀리, 항상 기존의 과학 저서에서 교조적 인물로 그려지는 프리스틀리가 사실은 아주 '다원적'인 학자였다는 주장입니다. 다음을 보실까요,

그가 1796년에 출간한, 플로지스톤을 방어하는 저서는 이에 관한 감동적인 증언이다. 프리스틀리는 “자유로운 토론은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이 과학계에서 비非교조주의적인 길을 걸어왔음을 상기시켰다. 

물론 결국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론에 흠결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부아지에도 칼로릭이라는 가상의 개념-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진-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소 이론은 충분하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라부아지에는 무게라는 개념에 집착하여 '질량 보존의 법칙' 등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 당시 실험으로서는 이러한 정확한 질량의 규정 자체가 어려운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후대의 과학자들은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산소주의를 '채택'하며, 그 이론의 대강을 취하면서, 그 라부아지에의 견해에 '권위'를 부여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프리스틀리가 갖춘 미덕 중의 일부는 완전히 폐기되며, 승리자인 라부아지에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편견에 합의를 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과학의 권위자들에 의해 폐기된 '플로지스톤주의'에서도 유용한 개념들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라부아지에는 산화- 환원 반응을 '산소'에 주목하여 설명합니다. 그런데 염산 HCl은 산소 없이 일어나는 반응이죠.

따라서 '염산'이라는 용어조차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플로지스톤주의'에서 플로지스톤을 '전자'의 개념으로 변환시키면, 산화-환원 반응에 대한 더욱 좋은 이론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렇게 저자는 과학에 있어서도 '다원주의'가 들어설 틈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끝으로 한 문장을 들려드리며 이 포스팅을 마치고자 합니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주의는 게으른 방임과 판단 포기를 함축한다. 다원주의는 판단을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단 하나의 가치 있는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보다 다수의 가치 있는 시스템들을 육성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다원주의는 지식의 육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내가 말하는 다원주의의 관건은 단지 지식 평가가 아니라 지식 육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원주의는 상보적 과학 프로젝트의 바탕에 깔린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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