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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책리뷰)

[책 리뷰]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그리고 마광수 사건

by 석아산 202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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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마치 공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죠.

이는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그건, 우리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분들이 쌓아올린 '자유 사상'에 근거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오랫동안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습니다. 노예 근성이 있는 자들은, 스스로, 나는 숨을 쉴 자격이 없다고 말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는 결국 종식되는데, 영국의 명예 혁명, 프랑스 혁명 같은 정치적 사건, 그리고 구텐베르크 혁명이나 바로 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출간과 같은 문화적 사건의 영향이 지대했습다.

 

자, 이 '자유론'은 칸트의 '자유'와 같이,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자유를 아주 설득력있는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떠한 국가나 단체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금도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은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바라고, 저는 오늘 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한 가지 사건을 가져와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광수 교수 필화 사건'입니다.

1992년이었죠. 형사들이 강의실에 쳐들어와, 강의를 하고 있던 마광수 교수를 체포해 갑니다.(벌써 여기서부터, 경악스럽지 않나요. 지금 그러면 큰일날 것입니다.)

체포 이유는, 음란한 포르노그라피를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마광수 교수는 당시 여대생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그린 '즐거운 사라'라는 작품을 썼더랬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저는 어른들이 마광수 교수를 '변태'라거나 '악마'라고 조롱하고, 연세대 교수쯤 되어서 저런 쓰레기를 쓰느냐고 핀잔을 주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저도 어린 나이였으니, 어른들의 말을 좇아 신나게 마광수 교수를 '마귀'라고 부르며 조롱하였죠.

하지만 나이가 들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니,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술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검열입니다. 이런 사건들은 예술가를 위축시켜, 표현의 예봉을 무디게 만듭니다.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맥빠진 예술 형태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죠.

 

 

 

여기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그는이러한 정서적이며 감정적인 핍박 역시 자유에는 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해악을 가하지 않는 사안일 때는 말이지죠. 여기서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마광수 교수가, 이 '즐거운 사라'라는 글을 다른 사람에게 읽으라고 강요하기라도 했나요?

이러한 소설이 널리 퍼진다고, 국가나 국민에게 해가 됩니까? 사람들이 이걸 보고 음란해진다고요?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거죠.

 

 

그런데 당시 서울대학교 손봉호 교수 같은 사람은 '즐거운 사라 때문에 에이즈가 퍼진다'는 망언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인권의 화신'처럼 행세하던 안경환 같은 이도 이 소설에 대해 '음란'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한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안경환 같은 이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독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근엄한 고전이 된 셰익스피어는 짱이고, '즐거운 사라'같은 듣보잡은 예술도 아니다, 라는 권위주의적 의식이 아주 뼛속까지 들어찬 사람인 것이지요.

 

예술에 대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예술이나 작품을 판단하지만, 대부분 우리의 식견은 형편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니 예술 앞에서는 일단 '현상학적 생각 멈춤'을 하고, 그 작품을 면밀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여야만 우리는 그 작품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습니다. 안경환 씨는 그런 면에서, 당시 재판에 중요한 감정 진술을 한 사람으로써, 태업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음란성을 가지고 있고, 예술적 가치가 없으며, 여러 국민에게 해가 될 수 있으므로, 마 교수는 당해도 싸다! 꽝꽝!! 이런 식인 거죠. 이렇게 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는 묵살되고 만 것입니다. 

 

'자유론'에 따르면, 이러한 경찰의 개입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 마광수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어떤지 공론화된 장에서 토론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 당한 꼴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마광수 교수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 역시 약탈해 간 꼴에 다름이 없습니다.

 

예전,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그림이 유행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카바넬의 작품으로, 비너스를 그렸습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을 거액에 사들였죠.

 

 사람들은 이 그림의 세부 묘사와 색감에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전시된 이 그림에 대해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죠.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작품으로, 한 창부를 그린 그림입니다. 창부는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요. 흑인 하녀는 남성 고객이 보낸 꽃을 창부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검은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음란함'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당시 남성들은 이 그림을 '포르노그라피'로 단정짓고, 아주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를 본 남성들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며 우산으로 이 그림을 찔러 훼손하려 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전시장 측에서 이 그림을 지팡이가 닿지 못할 정도로 높이 올려 다시 걸었다고 하죠.

 

 

 

 자, 그런데 이 그림들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도대체 어떤 그림이 더 음흉하고 포르노 같습니까? 첫번째 그림을 봅시다. 바다 위에 비너스가 놓여 있는데, 신화를 빌렸을 뿐, 아래 그림보다 훨씬 음탕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당시 프랑스 파리의 남성들은, 돈이 좀만 있으면 창녀를 하나쯤 데리고 있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네의 그림을 보고 비난을 한다고요? 뜨끔했던 거겠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렇다고 마네를 잡아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는 것이 옳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위의 카바넬 그림은 잊혀지고, 아래 마네의 그림은 역사를 바꾼 명작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일종의 사필귀정이라고나 할까요.

반면 우리나라에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금서입니다. 웃기는 일이지요.

 

자, 오늘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의 꼭지 중 하나를 빌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제 이 책을 '자유를 찾아나가는' 방향에서 읽는 것은 좀 철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자유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안의 부자유를 털어버린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아직도 너무나 유용한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석아산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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